섹슈얼 다큐멘터리를 추구한 작가들 [90-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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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핑을 소재로 한 요요기 감독


음란 퍼포먼스 스페셜, 연인[いんらんパフォーマンススペシャル 恋人] 은 요요기[代々木忠] 감독이 파트너 체인지, 스와핑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이다. 섹스리스에 빠진 커플은 요요기 감독의 알선으로 AV 배우를 소개받아 서로 스와핑을 한다. 이후 서로의 본심을 확인한 커플은 결국 해어지기에 이른다.

어째서 AV에 다큐멘터리란 용어가 등장하는가? AV는 성애 감각을 모티프로 한 첨예적 도큐멘트로서 총체적으로 퀄리티를 높여 갔다. 필자는 AV의 본질은 다큐멘터리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AV관계자 이외에도 그러한 상황을 평가하는 비평가나 문화인은 많았다.

요요기[代々木忠] 감독이 87년부터 90년까지 제작한 음란 퍼포먼스 스페셜 [いんらんパフォーマンススペシャル] 시리즈는 총 50회까지 만들어졌는데 초기의 작품 구성은 연애 관계나 부부 관계에 있는 남녀가 준비한 남배우, 여배우와 몸을 겹치는 것으로 일어나는 동요, 질투나 파탄 행동을 통해 성애의 본질에 강요하는 것이 많았다.

  • 요요기는 70년도부터 로망 포르노를 제작한 원로 감독이다 ▶ AV가 태동하다
  • 요요기가 80년도 다큐멘터리 기법을 차용해 대히트를 친 사례 ▶ 최초의 AV

이 작품을 영화 감독인 짓소지 아키오[実相寺昭雄, 울트라 맨을 연출한 특촬물 전문가] 는 이런 참신한 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품평했다.

“90분이 질리지 않았으며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어덜트도 굉장한 방법을 취하는구나, 라고 감탄했습니다”( 「조사 정보」87년 11 월호)

아다치 노리유키[足立倫行, 논픽션 작가] 는 AV업계를 취재한 『어덜트 사람들』 에서 “요요기 감독이 이 시리즈로 제시한 것은, 남녀의 성관계를 기반으로 한 일반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랑」은, 실은 상호의 소유욕구와 집착심의 산물이 아닌지, 라는 물음이었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요요기 작품에 대한 높은 평가는, 매스컴의 문화적 흥미를 꺼내, AV=즉물적 포르노라는 경멸을 고치게 하여 교양인의 감상을 견뎌내는 작품도 존재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잔혹한 섹스의 대부, 아다치 카오루


아다치 카오루는 외교관 아버지의 영향으로 해외에서 거주하는 일이 많았다. 광기어린 엽색[獵色]의 집착은 서구 포르노의 영향도 작용했으리라 본다.

여기 요요기 감독과는 반대로 폭력적이며 즉물적 성격이 강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다치 카오루[安達かおる] 이다.

V&R 플래닝[V&Rプランニング] 을 설립한 아다치 카오루는 본래 70년대 TV 제작사인 텔레캐스 저팬[テレキャス・ジャパン] 프로듀서 디렉터로서 활동했던 인물로서 주로 해외 B급 영화 판권을 사와서 방송국 판매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아다치와 가장 거래가 많았던 것은 도쿄 12 채널(현·텔레비전 도쿄)에서 방영된 “금요 스페셜”이다.

“금요 스페셜”은 70년부터 84년까지 금요일 밤 10시부터 방송된 60분 프로그램으로 잔혹, 에로틱, 쇼킹 등 과격한 테마의 내용을 내보내는 저속한 프로그램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판권 매입 경력으로부터 아다치는 잔혹과 폭력이라는 소재, 그것도 다큐멘터리적 문법이 장사가 될 수 있다고 잘 알고 있었다. 

 

아다치가 이세린 타로[伊勢鱗太朗] 감독에게 외주를 의뢰한 침범[侵犯] 은 1만개 이상 세일즈를 기록한 히트작이었다. 너무 리얼한 강간 장면 때문에 진짜 강간이 아니냐는 문의가 폭주했다고 한다.

영화 시장에는 쇼킹·다큐멘터리에 대한 일정한 수요가 있어, 비디오 상품으로서 성립하는 변통이 그에게는 있던 것이다. 아다치는 그러한 쇼킹·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을 AV에 반입하려고 했다.

아다치는 86년 10월에 AV로서의 제일작 「능욕 조교」를 발매, 그 후 잇달아 신작을 릴리스 한다. 초기 작품의 대부분은 새디즘의 극치를 목표로 한 하드 SM의 도큐멘트이었다.

 

V&R 플래닝이 낳은 인재들


V&R의 대표적 인물 3인방 아다치 카오루[가운데], 컴퍼니 마츠오[좌], 바쿠시시 야마시타[우]

이러한 작품 경향의 탓으로 「V&R」의 회사명은 「Violence[폭력]&Rape[강간]」의 약어와 착각 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Visual[시각적]&Retail[소매]」 의 약어이다. 비디오 제작 판매 보다 먼저 신선식품 판매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인 회사명이다.

다만 이런 류의 작품은 취미 편향의 매니아전용이라 큰 히트가 되는 것은 드물었지만, AV에 착수하기 이전으로부터 도큐멘트 지향이 강했던 그는 신진 사원 감독에게 옥외나 해외에서의 로케이션을 여행시켜, 기재면에서는 최신형의 소형 카메라 도입을 추진했다.

그 결과, 80년대에 동사에서 데뷔한 당시의 컴퍼니 마츠오[カンパニー松尾] 와 바쿠시시 야마시타[バクシーシ山下] 산하들은 그 젊은 감성에 따라 지방촬영에서 8mm 카메라로 참신한 도큐멘트를 찍고 포르노와 융합시키는 데 성공한다.

 

셀카물의 황태자, 컴퍼니 마츠오


오늘날 HMJM 으로 유명한 컴퍼니 마츠오[カンパニー松尾] 는 87년부터 95년까지 약 8년간 V&R에 재직했다.

컴퍼니 마츠오는 지방도시의 AV출연 지망자에게 출장을 가서 스스로 8밀리 비디오를 한 손에 쥐고 끼우고 찍는 「나를 여배우로 해 주세요, 私を女優にして下さい」를 91년에 발표했다.

이것은 하메도리[셀카물]와 아마추어, 그리고 로드 무비의 요소를 거두어 들인 최초의 작품이 되었다. 마츠오 작품은 영업적으로도 좋은 성적을 남기고, V&R에 새로운 노선을 개척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화적 감성을 가진 하메도리의 마스터 피스로서 많은 팔로워를 낳는다.

 

하드보일드한 현실론자, 바쿠시시 야마시타


바쿠시시 야마시타[バクシーシ山下]는 절친 컴퍼니 마츠오의 권유로 V&R에 입사하여 96년까지 재직한다.낙관론을 배재한 극도의 사실주의를 AV에 접목했다.

바쿠시시 야마시타는 앞서 이세린 타로가 만든 「침범,侵犯」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유사 강간 작품인 「여범,女犯」으로 90년에 데뷔해, 너무 사실적인 연기지도 탓에 페미니스트 단체가 진짜 강간으로 착각해 규탄받는 피해를 맛봤다.

이러한 정치성이 강한 소동에 휩쓸린 적도 있어, 야마시타는 SM적 설정중에서 AV여배우의 표류민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도큐멘트 제작에 경도되어 간다.

 

92년에 발표한 바디 노동자 계급 [ボディコン労働者階級] 이야 말로 바쿠시시의 하드보일드적 시각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일 것이다. 이 문제작은 도쿄 산야지구에 AV여배우를 데려와 일용직 노무자, 노숙자와 얽히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성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게릴라성과 무정부주의를 다룬 도큐멘트로서 이 점만 보아도 바쿠시시가 대중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감독임을 알 수 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노동자들과 인터뷰 후 옥야에서 실전을 갖는다

바디 노동자 계급 도입부

 

감성적 작가주의자, 히라노 카츠유키


V&R에서 외주로 참여한 히라노 카츠유키[平野勝之 ,좌측] 는 독립영화 감독 출신으로 화려한 입상 경력을 소유한 엘리트였다. 에반게리온 감독 안노 히데야키[庵野秀明, 우측] 은 평소 히라노 감독을 존경해마지 않았다며 그의 팬임을 밝힌 바 있었다.

아다치 카오루는 외주의 감독을 초빙하여 AV의 첨단 영상을 추구해 가는 일이 된다. 이 시기, 외주 감독으로서 V&R에 참가한 히라노 카츠유키는 「미토 고문 끌고 다니기,水戸拷問 大江戸引き回し」(92년), 「더·터부 연인들,ザ・タブー 恋人たち」(93년) 등으로 단번에 주목을 끌었다.

그것들은 매니아도 프로도 아닌 출연자에게 SM행위를 대해 일어나는 소동을 기록한 악몽적인 도큐멘트로, 영상의 일변칙적 완급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역작이었다. 

이러한 영상을 낳을 수 있던 것은 그가 독립 영화계의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무정부 상태인 자기 주장과 상업 영상의 접점을 모색한 끝에 그는 AV업계에 간신히 도착해, 실험 영화와 포르노를 융합시킨 과격한 도큐멘트를 낳은 것이다.

 

96년 발표된 두근두근 불륜여행 200발 했다[わくわく不倫旅行 200発もやっちゃった] 는 감독 히라노 카츠유키와 하야시 유미카가 도쿄에서 홋카이도까지 41일간 자전거로 주행하며 여행기를 다룬 로드무비이다. V&R에서 출시되었으나 AV가 아닌 성인 영화에 가까우며 마니아적 인기를 바탕으로 극장에서 자전거 불륜 노숙 [自転車不倫野宿ツア] 이란 이름으로 재편집되어 상영된다.
하야시 유미카[由美香] 는 “도쿄 유부녀 준코” 라는 한국 영화에도 출연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녀의 발자취를 기록하고자 “안녕 유미코” 라는 영화가 2009년 제작되었는데 재일교포인 감독은 한국과 인연이 닿은 그녀에 호기심을 가져 추적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마츠오-야마시타-히라노 세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는 바로 하야시 유미카일지도 모른다

  • 히라노 감독이 회고한 생전의 하야시 유미카에 대하여 ▶ 클릭

90년대 도큐멘트 AV가 미친 영향


90년대의 AV에서는 테마의 사회성과 영상의 참신함에 두어 컴퍼니 마츠오, 바쿠시시 야마시타, 히라노카츠유키 이 세 명 (약간 세대는 다르지만 여기에 타카츠키 아키라[高槻彰]를 가세해도 괜찮다) 은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 완성도는 도큐멘트로서의 AV의 도달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좋다. 그들의 작품은 AV업계 뿐만 아니라 영화계의 도큐멘탈리스트에도 영향을 주었다.

옴진리교의 추악한 실체를 영화로 담아낸 “A”, “A2” 감독 모리 테츠야[森達也] 는 히라노의 「자전거 불륜 노숙」의 촬영 기술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고, 앞서 하야시 유미카 회고작인 “안녕 유미코”를 만든 재일감독 마츠에 테츠아키[松江哲明] 도 마츠오, 야마시타, 히라노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음을 밝혔다.

이 같이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에 걸쳐, AV는 다른 어느 장르의 모방도 아닌, 극단적으로 오리지널리티의 강한 영상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그것들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오리지날의 포르노이며, 촬영기재가 일본의 국산이었단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일본의 예지가 낳은, 독자적인 영상 문화의 발달의 성과다.

다만, 앞서 요요기나 컴패니 마츠오의 작품은 세일즈면에서도 건투를 계속했지만, 첨예적인 도큐멘트 AV는 반드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도큐멘트의 특성을 의식적으로 추구한 만큼, 대중의 포르노적 흥미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시대, 대중의 포르노적 흥미는 다른 AV세력의 대두에 의해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했다.

 

[이 칼럼은 후지키 TDC [본명 : 후지키 타다시]씨가 탈고한 성인 비디오 혁명사 [2009년, 幻冬舎新書] 를 바탕으로 발췌, 번역한 것입니다. 다수의 의역과 오역이 있으므로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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