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미 유마 Re Start23 개의 글 중 16 번째 글입니다.

친가의 파산으로 집이 팔리다


시치고상[七五三]의 나들이 옷을 입고 아버지와 기념촬영 필리핀 퍼브의 직원 기숙사 앞에서

도쿄로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의 나는, 어머니나 언니와는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아버지와는 전화로 이따금씩 얘기하는 정도였습니다. 친가에 돌아갔을 때, 매우 드물게 얼굴은 마주치고 있었습니다만, 아버지는 변함 없이 동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제가 기르는 개를 묻는다든지와 같은 시시한 대화만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내심 비추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나는, 아버지가 운전 대행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쭉 계속하고 있었는가 어떤가는 모릅니다. 언니나 오빠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저와는 다를지도 모릅니다만, 적어도 제게 아버지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상냥한 존재였습니다.

도쿄에 나오고 나서 이윽고, 부모님에게 휴대전화를 선물 했습니다. 도코모[ドコモ] 의 라쿠라쿠폰 [ドコモ, 도코모에서 만들어진 스마트폰의 시초임] 입니다. AV의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부모님의 통화요금도 매월 내가 지불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변함없는 마이 페이스라 기계치이기도 해서 메일을 보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한편, 아버지는 빈번하게 나에게 메일을 보내 주었습니다. 메일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고, 오자 탈자 투성이의 짧은 문장이었으나 익숙치않은 휴대폰에 악전고투 하면서 메일을 쓰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떠올라, 한마디만의 메일도, 매우 기쁘게 느꼈습니다.

도쿄로 상경한지 2년이 지났을 무렵의 일입니다. 나는 여권을 갱신하기 위해 처음으로 직접 갔습니다. 최초로 여권을 신청했을 때는 수속을 어머니에게 부탁하고 있었으므로, 호적을 보는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순간, 나의 손은 무심코 멈추어 버렸습니다. 언니와 오빠가 아버지의 「양자」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정말로 상냥한 아버지가, 언니나 오빠를 괴롭히던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에, 한 번 다른 사람과 결혼해, 이혼하고 있던 것입니다. 언니와 오빠는 어머니의 의붓자식으로, 아버지와 재혼해 내가 태어난 것입니다. 언니와 오빠와 나와는 부친이 다르다… 언니와 오빠는, 아버지와는 피가 연결되지 않았다…….언니나 오빠도 그 일을 알고 있던 것 같습니다만, 가족의 누구라도 나에게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다. 반드시 어린 내가 상처 입을 것을 배려해 주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빠가 자살한 원인이, 아버지와 관계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언니가 빨리 집을 나왔던 것은, 아버지와 피가 연결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던 것 같습니다. 이 때, 나는 20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도, 여러가지 사정을 안아 살아 왔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연령입니다. 가족임은 변함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파산하여 친가의 맨션이 압류가 되었다고 하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필리핀 퍼브로 만든 빚을 반제하지 못해 막바지에 몰린 것입니다. 다행히, 제가 맨션을 현금으로 일괄로 구입하여 이사 비용도 거의 내가 냈습니다만 이사를 하면서 유년 시절의 추억을 담은 물건들이 거의 처분되어 있었던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졸업 앨범도, 제복도, 콜렉션 하고 있던 트레이딩 카드, 편지, 사진 등 이것도 저것도, 어머니는 버리게 된 것입니다.

(추억의 물건이라 조금은 보관해두었다면 좋았을텐데…. 엄마답다고 하면 그렇지만, 처분하기 전에 단 한 마디라도 나에게 상담해 주면 좋았을걸!)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


아버지가 유일하게 보러 와주신 달리기 대회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는 자주 이때 얘기를 하셨습니다.

언니의 전화로, 아버지가 기침이 멈추질 않고, 이상할 정도로 야위어지고 있음을 들었습니다. 언니는 아버지에게 병원에 가는 것을 강하게 권했습니다만, 이 때 아버지는 건강 보험료를 지불할 여유조차 없어서 보험증을 가지지 않았고, 병원에 가지 못하고 있던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듣고

왜 좀 더 빨리 말해 주지 않았어! 쌓인 보험료나 치료비는 내가 낼 텐데!

라고 말해, 아버지는 간신히 병원에 갔습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폐암」 「폐기종」 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때 발견한 암은 초기였기 때문에 나는 수술을 하면 낫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술날 나는 병원을 찾았습니다.

(아빠 괜찮은 것일까?)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관으로 연결된 아버지의 여윈 모습을 보면서 왜 좀 더 빨리 눈치채지 못했을까 치료가 속히 이루어졌다면하고 마음속으로 후회했습니다. 사태가 변한 것은, 수술이 지나고 주치의의 선생님으로부터 설명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아버님께서 금년 겨울을 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아버지의 종양은 폐기종 탓으로 전부 절제 다 할 수 없었고 암세포가 전이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여생 1년」이라고 하는 이라고 하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아빠가 죽는다니 있을 수 없어 아빠는 절대 죽지 않아)

나는 일하는 동안 잠깐 동안 문병을 나갔다가 그때 아버지가 보여주시는 기쁜듯한 그런 웃는 얼굴에 안심했습니다.병실에는 제 사진이 많이 붙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내가 어렸을 때의 추억담을 해주셨습니다.

초등학교의 오래 달리기 대회를 보러 갔을 때, 사야짱은 1위를 했었지…

침대 옆에는 낯익은 너구리 지갑도 놓여 있었습니다.내가 어렸을 때 쓰던 거라 아버지는 그런 내 지갑을 소중하게 써주곤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아버지에게 전 귀여운 아이의 사야짱입니다. 일에 쫓겨 보험료나 입원비 지급을 잊어버려서, 아버지로부터 

미안하지만, 돈을 입금해주세요

라고 하는 자동 응답 전화가 들어가, 당황해 수속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한심한 말을 딸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확실히 기일대로 돈을 보내고 있으면……하고, 지금도 슬퍼집니다. 2010년 들어서 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약해졌습니다. 암이 재발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스스로 걷지도 못하게 되고, 마지막 순간에는 침대에 누운채, 어두운 눈으로 정면을 보고 있을 뿐…. 나를 알고 있는지, 보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내가 괜찮아?라고 말을 걸면, 아버지는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굿이라는 사인을 반복해 주십니다. 그렇게 딱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의 앞에서는 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필사적으로 견뎠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참지 못하고, 몇번이나 화장실에 뛰어들었습니다.

(아빠…… 이제 힘들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


야쿠자를 닮은 바람의 아버지[웃음] 가게 여직원들은 “마스터” 라고 불렀습니다.

병실의 아버지로부터 때때로 와 있던 메일이 점점 적게 되어, 아버지의 모습은 어머니로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무사히 겨울을 넘기고,〈역시 아빠는 괜찮아!〉라고 생각하던 참에, 업무중에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빠가 위독한 상태로, 언제 죽어 버릴지 몰라 빨리 와!

촬영을 연기해 받아, 곧바로 돌아갔습니다만, 내가 도착했을 때는, 아버지의 의식은 벌써 없고 혼수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빠 제발 힘내 절대 죽지마! 

나와 언니는 필사적으로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만, 어머니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침착해 조용하게 아버지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긴 간병 동안, 아버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쭉 봐 온 어머니는 묵묵히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한밤중이 되어도, 우리 가족은 침대의 곁에서 아버지를 계속 격려했습니다. 전신으로 호흡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하는 상태의 아버지를, 우리는 지켜볼 수 밖에 없습니다. 새벽녘이 되어, 돌연, 담당의 선생님이 병실에 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신체를 조금 조사하면, 우리 가족에게 다시 향해, 이렇게 고한 것입니다.

돌아가셨습니다. 임종입니다.

(어, 아직 심전도도 움직이고 있는데! 거짓말이야!)

전 어이를 상실했습니다. 아버지의 신체에 연결되어지고 있던 심전도 모니터는 아직 「픽, 픽」하고 움직이고 있던 것입니다. 아직 살아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기계는 고장 나고 있어서 간호사실에 보내지고 있던 데이터로, 심폐가 멈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체 뭐야? 어떻게 이런 일이…)

2010년 7월 3일의 아침,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65세였습니다. 어머니나 언니도, 병실의 아버지를 보면서 가만히 침묵을 지켜, 슬픔에 참고 있었습니다.

(아빠…… 정말로 죽어 버렸어?)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들어도, 당분간은 실감이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정말 좋아해 의지하고 있는 아빠가 죽어 버리다니…….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잠시 후에, 큰 슬픔과 상실감이 덮쳐 왔습니다. 그런데도 눈물을 견디면서, 자신이 지금 해야 할것에 집중했습니다.

(이런 때야말로, 내가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늘 끓여주셨던 이리[정소]가 들어간 대구탕

현지의 장례식에서 치루게 되었고 나는 홀의 일실에서, 이불에 쌓인 아버지의 곁에 앉아,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빠, 난 이제 아빠가 만들어준 요리를 먹을 수 없는거야? 언제나 만들어주던 이리가 들어간 대구탕 말이야 나 어렸을 때는 이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뇌가 들어간 된장국” 이라고 말했잖아….

노래도 했습니다. 에비스 마스캇트의 데뷔곡 『바나나·망고·하이스쿨』입니다. 어머니와 언니는 마스캇트의 라이브를 보러 와 주고 있었습니다만, 아버지는 병으로, 한번도 라이브를 보지 못했습니다.

아빠, 알고 있어? 내가 노래하고 있는 곡이야. 듣지 못했지?

죽어서도 얼마간 귀는 들리고 있다는 그런 얘기를 얼핏 들어서 저는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버지에게 소복을 입히는 것을 도와, 손톱을 자르거나 몸을 예쁘게 닦아 주거나 했습니다. 머리에 팔랑팔랑한 헤어터번같은 것이 감겨진 것을 보고 “아빠, 사랑스럽네?” 라고 말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넘쳐 나와 멈추지 않습니다. 매우 슬펐지만, 마지막이라도 아버지께 오래 들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의에는, 아버지의 친척이나 매니저 나카야씨도 찾아주었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살그머니 말을 걸었습니다.

(나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서 행복했어 또 만나요 아버지, 반드시!)

 

아버지의 남겨진 온기


아버지가 사용하던 휴대전화에는 어머니와 나의 대기화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발송 메일도 많이……

장의를 끝내면 도쿄에 돌아와, 바쁜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마음에 큰 구멍이 열린 것 같은 외로움을, 일을 하는 것으로 감추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휴대폰을 보고 싶어졌습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가까이에 있던 것으로〈아빠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라고 생각해, 도쿄에 가지고 돌아오고 있던 것입니다.

휴대폰을 열어 보면, 거기에는 나의 사진이 몇매나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내가 작았던 무렵의 것으로, 어른이 되고 나서 함께 찍은 것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 마스캇트로 텔레비젼에 출연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많아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티비화면을 통해 내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던것이 너무 기뻐서 여러 감정들이 뒤섞인체 아버지 핸드폰을 움켜쥐면서 방에서 혼자 쭉 울고 있었습니다.  문득, 미송신 메일의 박스를 열어 보면, 내 앞의 메일이 몇통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잘 지내니?」 라고 한 간단한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중에, 이런 메세지를 찾아낸 것입니다. 「전화해 주세요」 아버진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바쁠 것이라고 사양하고 있던 것이지요.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제가 소학교 때 찍은 사진 뒤에 아버지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나에게 닿지 않은 아버지의 메일………..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기껏 아빠로부터 메일을 받아도, 별로 답장하지 못하고……., 정말로 미안해요 아버지…. 그리고 내가 갓난아이였을 적 무렵의 사진을 찾아내, 뒤를 보면, 나 앞으로 보낸 유언과 같은 것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건강했을 적 이제 남은 생이 않다고 생각해, 쓴 것이지요. 이것이 나에게 있어, 아버지로부터의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사야짱 못난 아빠라서 미안해 너에게 행복이 가득하길 아빠는 언제나 소망하고 있단다 언제나 쭉 지켜볼테니까…

너무 좋아했던 아빠. 농담이 너무 좋아했던 장난꾸러기 아빠… 어른이 되면 아빠가 타고 다니던 CIMA를 타고 싶었어 아빠, “나의 운전으로 어딘가에 드라이브 가고 싶다”라고 말했었지? 동물을 아주 좋아했던 우리 아빠 개와 고양이가 젖은 코 만지는걸 좋아했는데 나에게도 아빠의 버릇이 옮아서, 지금도 똑같이 개나 고양이 코를 만지고 있어. 엄마를 많이 사랑했었지? 엄마 걱정마세요. 아빠 몫까지 내가 노력해서 행복하게 할게요 나도 아빠같이 자신을 많이 생각해주는, 사랑해 주는, 소중하게 해줄 남자를 만나고 싶어요.

저 아빠와 엄마의 딸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아빠 사진은 지금도 침대 옆에 장식하고 있어요. 쓸쓸할 때는 그것을 봐요.아빠가 곁에 있을거라고 생각하면서. 매일 매일 아빠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아빠는 나에게 “고생만 끼쳐 미안” 라고 말했지만 난 한번도 아빠가 못난 아빠라고 생각한 적 없어. 내게 존경하는 자랑스런 아버지이에요

좀 더 효도 하고 싶었는데 좀 더 오래 살아주었으면 했는데 좀 더 만나러 가면 좋았을 텐데. 좀 더 가득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실은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새로운 아버지의 메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원고를 쓰고 있는 한중간도, 몇번이나 몇번이나 눈물이 나왔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빠의 일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늘 쭉 지켜보고 있어.

 

해당 시리즈 살피기<< AV 배우에게 연애는 사치인 것일까? [14부]아버지의 죽음으로 깨달은 가족의 소중함 [16부] >>